발행일: 2026-08-29 11:20 (토) 08.29 (토)
집회의 자유인가, 공공 공간의 점유인가

집회의 자유인가, 공공 공간의 점유인가

광화문은 누구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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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삽화이다.(일러스트=김현지 작가)
서울 도심의 중심축인 광화문 세종대로가 다시 멈춰 섰다. 주말마다 약 1만 명 규모로 모인 사랑제일교회 측 참가자들이 차도를 점거하면서 도로는 통제되고 버스는 정류장을 지나치거나 우회 운행을 반복하고 있다.

도심의 흐름은 끊기고 시민의 일상은 그 위에서 흔들린다. 이번 집회의 재개는 단순한 현장 갈등이 아니다. 경찰의 금지 통고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집행정지를 인용하면서 집회의 자유는 다시 차도 위로 내려왔다.

그 중심에는 전광훈 목사가 주도하는 집회가 있다. 법의 판단은 집회를 막지 않았고 그 결과 도로는 다시 정치적 표현의 공간으로 전환됐다. 문제는 한 번의 집회가 아니라 반복되는 점유에 있다.

수백 일에 걸쳐 이어진 집회 신고와 실제 점거는 광화문 일대를 특정 집단이 지속해 사용하는 공간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본래 이동을 위해 설계된 도로는 이제 집회의 무대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시민의 통행권과 도시의 기능은 끊임없이 충돌하고 있다.

이 질문은 더 이상 단순하지 않다. 집회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그리고 그 자유는 공공의 공간 위에서도 제한 없이 행사될 수 있는가. 결국 이 문제는 하나로 수렴된다. 광화문은 과연 누구의 것인가.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집회의 자유는 절대적인가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을 이루는 기본권이다. 헌법은 이를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으며 국가 권력은 이 권리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오랜 법리의 축적된 결론이다.

실제로 헌재 2008헌가25에서 헌법재판소는 야간 집회를 일률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

집회는 단순한 의사 표현을 넘어 시민이 권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된 것이다. 이 판례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집회의 자유는 ‘허용되는 권리’가 아니라 ‘원칙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권리’라는 것이다. 국가가 이를 제한하려면 매우 엄격한 기준과 정당성이 요구된다. 이번 광화문 집회 역시 같은 법리 위에 놓여 있다.

경찰이 차도 집회를 금지했음에도 법원이 이를 멈춘 것은 단순히 특정 집회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국가 권력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헌법적 원칙을 다시 확인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미지 삽화이다.(일러스트=김현지 작가)
이미지 삽화이다.(일러스트=김현지 작가)

하지만 모든 자유에는 경계가 있다

그러나 집회의 자유가 절대적인 권리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헌법 질서 안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권리가 동시에 존재하며 이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통행권, 교통질서, 공공의 안전은 모두 보호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이며 집회의 자유 역시 이들 권리와의 관계 속에서 조정될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는 헌재 2014헌바148 결정을 통해 집회의 자유가 공공질서와 안전을 위해 제한될 수 있음을 명확히 했다. 다만 그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하며, 반드시 비례성과 필요성을 충족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이는 국가가 집회를 제한할 수는 있지만 그 방식이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대법원 역시 대법원 2009도1388에서 집회로 인해 교통이 중대하게 방해된다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사회 기능을 실질적으로 마비시키는 수준의 방해 여부다. 결국 법이 제시하는 경계는 명확하다.

집회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지만, 그것이 타인의 권리와 공공의 질서를 지속해 침해하는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무제한으로 보호될 수 없다.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바로 이 경계선 위에 놓여 있다.

광화문은 점령되고 있다

598일, 도로는 사실상 점유됐다

광화문 집회의 본질은 더 이상 ‘집회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반복성과 지속성이다.

특정 집단이 장기간에 걸쳐 동일 장소에 집회를 신고하고 실제로 점유하는 구조는 단순한 권리 행사라기보다 공간의 고착화에 가깝다.

실제로 광화문 일대 집회 신고 데이터를 보면 일정 기간 전체 집회의 상당 부분이 전광훈 목사 관련 집회로 채워져 있다.

특히 사랑제일교회가 일요일 집회를 본격화한 이후에는 신고 가능 날짜의 대부분을 선점하는 형태가 반복됐다. 이는 단순히 집회를 여는 수준을 넘어 특정 공간을 사실상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상태로 이어진다.

이른바 ‘알박기 집회’로 불리는 이 구조는 법적으로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실에서는 강한 영향력을 가진다.

집회 신고가 선착순 원칙에 가까운 방식으로 운영되다 보니 지속해 신고를 반복하는 집단이 공간을 사실상 장기 점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집단의 집회 기회는 제한되고 공공 공간의 개방성 역시 크게 훼손된다. 문제는 이 점유가 일시적이지 않다는 데 있다.

하루의 불편이 아니라 수백 일에 걸친 반복이 누적되면서 시민들이 체감하는 영향은 질적으로 달라진다. 이는 더 이상 단순한 집회가 아니라 공공 공간의 사용 질서를 바꾸는 구조적 현상에 가깝다.

도로는 정치 공간이 아니다

광화문 세종대로와 같은 도심 주요 도로는 본래 이동과 연결을 위해 설계된 도시 기반 시설이다. 수많은 차량과 대중교통이 통과하는 이 공간은 도시의 혈관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러한 공간이 반복적으로 차단될 경우, 그 영향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도시 기능 자체의 저하로 이어진다. 도로는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는 대신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공공재다.

그렇기에 특정 집단이 이를 장기간 점유하는 것은 단순한 권리 행사로 보기 어렵다. 표현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 표현이 도시의 기본 기능을 지속해 훼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도시계획의 관점에서 보면 공간은 그 기능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광장과 공원은 집회와 표현 가능 공간으로 설계된다. 반면, 도로는 이동을 전제로 한 인프라다.

이 구분이 무너질 때 발생하는 것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도시 질서의 혼란이다.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도로는 더 이상 이동의 공간으로만 작동하지 않고 특정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대로 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시민의 통행권과 공공성은 점차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집회의 자유를 인정할 것인가 문제가 아니라 공공 공간의 사용 원칙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문제로 확장된다. 광화문은 지금, 단순한 집회 장소가 아니라 점유된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이미지 삽화이다.(일러스트=김현지 작가)
이미지 삽화이다.(일러스트=김현지 작가)

국가는 왜 통제하지 못하는가

법은 있지만, 기준은 없다

광화문 집회를 둘러싼 갈등이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적용할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집회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는 대신 이를 제한할 수 있는 요건을 엄격하게 설정하고 있다. 문제는 이 법이 ‘일회성 집회’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법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발생하는 집회가 공공질서에 미치는 영향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이 틀로 설명하기 어렵다.

하나의 집회만 놓고 보면 위법성이 크지 않을 수 있지만, 동일 장소에서 반복되는 집회가 누적되면서 발생하는 영향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확장된다.

그럼에도 현행법 체계는 이 ‘누적 효과’를 별도의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결국 경찰과 행정당국은 매번 개별 집회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동일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일관된 규제를 적용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진다. 법은 존재하지만, 반복 점유라는 현실을 다룰 수 있는 도구는 부족한 셈이다.

이 공백은 곧 집회의 자유를 둘러싼 새로운 유형의 갈등을 낳는다. 불법이 아니기에 막을 수 없고 그러나 공공의 불편은 계속 누적되는 상황. 광화문은 지금 법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의 전형적인 사례가 되고 있다.

해외는 이미 답을 가지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이와 유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각국의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공통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하나다. 집회의 자유를 인정하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리 기준을 명확히 두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경우, 노란 조끼 운동 당시 대규모 도로 점거가 이어지자, 경찰은 강제 해산과 통제 조치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집회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공공질서를 침해하는 수준에 이르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원칙이 분명하게 작동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 시위(Black Lives Matter protests) 과정에서 도로 점거가 빈번하게 발생했지만 이는 대부분 일시적 허용에 그쳤다.

장기 점거나 반복 점유가 이어질 경우는 즉각적인 해산 조치가 이루어졌고 법원 역시 이를 정당한 공공질서 유지로 인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독일은 더 구조적인 접근을 택한다. 집회 가능 구역을 명확히 설정하고 특정 장소에 대한 반복적 점유가 발생한다면 이를 제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

표현의 자유는 보장하되 공간의 공공성을 훼손하지 않도록 사전에 설계된 시스템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들 사례는 하나의 공통된 메시지를 던진다.

집회의 자유와 공공질서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관리와 설계를 통해 동시에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법적 원칙은 존재하지만, 이를 현실에 맞게 적용할 구체적 기준이 부족하다.

그 결과 갈등은 반복되고 해법은 지연된다.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만든 결과이며 동시에 그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국가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공공 공간의 주인은 누구인가

광화문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단순한 집회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와 모두가 공유해야 할 공공 공간의 원칙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에서 발생한 구조적 문제다.

집회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근간이며 어떤 경우에도 쉽게 제한되어서는 안 되는 권리다. 그러나 그 자유가 특정 공간을 장기간 점유하는 방식으로 행사될 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권력으로 변한다.

지금의 광화문은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법은 집회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있지만, 반복과 누적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에서 도로는 점점 특정 집단의 공간처럼 기능하고 시민의 통행권과 도시의 질서는 후순위로 밀려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불편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 자산의 사용 원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다.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자유와 질서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명확한 기준과 일관된 적용을 통해 함께 유지될 수 있는 가치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아직 이 균형을 제도적으로 완성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 결과, 갈등은 반복되고 해법은 뒤로 밀린다. 결국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광화문은 누구의 것인가. 그 답은 분명하다. 광화문은 특정 집단이나 특정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그것은 모두의 공간이며 그렇기에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 자유는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공공 공간을 장기적으로 점유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허용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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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용 기자
admin@aju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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