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국장은 왜 모스크바로 날아갔나…이란전쟁이 만든 ‘미국의 빈틈’을 러시아가 보기 시작했다
- 존 랫클리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의 일러스트 삽화이다.(일러스트=박태현 작가) [CIA 국장이 비밀리에 모스크바를 찾은 배경에는 러시아가 장기화한 이란전쟁으로 미국의 군사적 여력이 약해졌다고 판단한다는 정보…
- 미국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당장의 나토 전면전보다 우크라이나 공세와 유럽에 대한 도발을 단계적으로 높여 미국의 개입 의지를 시험하는 시나리오다.
- 이란전쟁의 파장은 이제 중동을 넘어 우크라이나의 방공망과 유럽의 억지력까지 흔들고 있다.] 존 랫클리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지난 25일 비공개로 모스크바를 찾았다.

존 랫클리프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지난 25일 비공개로 모스크바를 찾았다.
미·러 관계가 사실상 적대상태이고 우크라이나전쟁이 5년째 이어지는 상황에서 현직 CIA 국장이 직접 러시아로 들어간 것부터 이례적이었다.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의 세르게이 나리시킨 국장은 이후 랫클리프와 ‘실무급 회동’을 가졌다고 확인했고 크렘린궁은 랫클리프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현직 CIA 국장의 모스크바 방문은 윌리엄 번스 당시 국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막기 위해 찾았던 2021년 이후 처음으로 알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방문을 “반쯤 일상적인 업무” 정도로 낮춰 설명했고 푸틴이 나토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이 전한 정보당국의 판단은 훨씬 무겁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랫클리프의 방문에 앞서 미국 정보당국은 푸틴이 6개월째 이어지는 이란전쟁으로 미국의 군사적 여력이 약화됐다고 보고 이를 우크라이나와 유럽에서 행동범위를 넓힐 기회로 판단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랫클리프가 모스크바까지 날아간 이유를 이해하려면 러시아군보다 먼저 미국의 무기고를 봐야 한다.
이란에서 소모된 요격탄이 우크라이나의 하늘을 얇게 만든다
지난 2월 말 시작된 미국의 대이란 군사작전은 단기 충돌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변했다.
미군은 이 과정에서 패트리엇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요격탄뿐 아니라 토마호크 순항미사일과 장거리 정밀타격무기를 대량으로 사용했다.
로이터는 미국이 이란전쟁에서 장거리 정밀타격 미사일의 상당량을 소진하면서 향후 다른 지역에서의 작전능력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정확한 군수재고는 기밀이다. 다만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공개자료를 토대로 패트리엇 요격탄 재고가 1,000발 미만, 사드 요격탄도 수백 발 수준까지 감소했을 가능성을 추산하고 있다.
이런 숫자는 확정된 재고가 아니라 생산량과 과거 보유량, 사용량을 토대로 계산한 추정치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문제는 생산속도다. 첨단 요격미사일은 전쟁에서 며칠 만에 수백 발을 소비할 수 있지만 생산능력을 같은 속도로 늘리기는 어렵다.
이란에서 발사되는 미사일을 막기 위해 요격탄을 사용하면 같은 무기를 기다리는 다른 전선의 여유도 줄어든다.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곳이 우크라이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탄도미사일을 막을 수 있는 핵심 수단으로 패트리엇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제대로 막지 못한 사례를 언급하며 추가 방공체계와 요격탄 지원을 거듭 요구하고 있다.
프랑스가 SAMP/T-NG 방공체계의 공급을 앞당기고 유럽이 추가 방공능력 확보에 나서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러나 새로운 방공체계가 생산돼 배치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이란전쟁이 러시아에 주는 가장 중요한 기회는 미국이 패배해서가 아니다.
미국의 무기 소모가 빨라지는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지원받을 수 있는 무기의 양도 제한될 수 있다는 점이다.
푸틴이 계산하는 것은 미국의 패배가 아니라 ‘동시에 몇 개 전쟁을 감당할 수 있느냐’다
미 정보당국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워싱턴포스트가 인용한 관계자에 따르면 랫클리프의 모스크바 방문이 필요했던 이유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러시아가 미국의 전력이 다른 전쟁에서 소모돼 적극적인 대응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
러시아가 미국보다 강해질 필요는 없다. 워싱턴이 중동과 유럽, 인도·태평양을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상황이다.
결국 유럽에 추가 병력과 무기를 투입하는 정치적·군사적 비용이 커졌다고 판단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다.
억지력은 무기의 숫자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상대가 “미국이 정말 개입할 것인가”라고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억지력은 약해진다.
최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장거리 미사일 공격을 확대하고 생산능력까지 늘리는 움직임도 이런 상황에서 더 중요해진다.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러시아가 탄도미사일 생산량을 크게 늘리고 추가 병력 동원까지 준비할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는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영국산 스톰섀도 순항미사일로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는 데 대해 영국 군사시설까지 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중요한 것은 개별 발언이 아니라 방향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안에서 군사적 압력을 높이는 동시에 유럽을 향한 위협의 경계선도 조금씩 바깥으로 밀고 있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저널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보당국은 러시아가 향후 나토의 대응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발트지역 등을 상대로 제한적인 군사행동을 검토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리고 랫클리프는 러시아 측에 나토 회원국을 공격하지 말라는 경고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러시아가 당장 폴란드나 발트 3국을 전면 침공할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트럼프 역시 푸틴이 나토 영토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러시아 역시 나토와 직접 전면전을 시작한다면 미국을 포함한 동맹 전체를 상대해야 한다. 따라서 더 현실적인 위험은 전면전 직전의 회색지대다.
영공과 영해 침범, 정체를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드론, 사이버공격, 해저케이블과 에너지시설 같은 기반시설에 대한 파괴공작, 우크라이나 공격의 단계적 확대처럼 나토조약 5조를 즉각 발동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서방의 대응 의지를 시험할 수 있는 수단은 많다.
이 방식에는 러시아 입장에서 중요한 장점이 있다. 나토와 직접 전쟁하지 않으면서도 미국과 유럽이 어느 지점에서 실제 행동에 나서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시험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점은 미국의 무기 재고가 줄고 다른 전선에 정치적 관심과 군사자원이 묶여 있을 때다. 랫클리프가 전달한 경고 역시 이런 계산을 차단하려는 성격이 강하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쟁을 크게 확대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으며 푸틴의 확전이 트럼프를 젤렌스키 쪽으로 더 기울게 만들 수 있다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는 단순히 “공격하면 보복한다”는 군사적 협박과 다르다.
트럼프 행정부는 우크라이나전쟁 종식을 압박하면서 젤렌스키 정부에도 상당한 양보를 요구해왔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바이든 행정부 때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한 협상환경이 조성됐다고 판단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약화를 지나치게 이용하면 오히려 현재의 정치적 이점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다.
“미국이 약해 보인다고 너무 멀리 가지 말라”는 메시지에 가깝다.
이란과 우크라이나는 이제 같은 미국의 무기고를 놓고 경쟁한다
이번 방문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의미는 이란전쟁과 우크라이나전쟁을 더 이상 완전히 별개의 전쟁으로 볼 수 없게 됐다는 데 있다.
미국이 이란의 미사일을 막기 위해 패트리엇과 사드를 사용하면 미국 본토와 해외 미군기지의 예비전력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유럽에 제공할 수 있는 여력에도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미국은 인도·태평양에서 중국까지 억제해야 한다. 결국 워싱턴의 전략적 문제는 무기가 절대적으로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무기를 동시에 필요로 하는 전선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보고 있는 것도 이 구조다. 푸틴에게 필요한 것은 미국을 군사적으로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미국이 모든 전선에 동시에 충분한 힘을 투입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순간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전략적 이득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랫클리프의 모스크바 방문은 단순한 CIA 수장의 이례적 출장이 아니다.
미국이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러시아의 무기 숫자만이 아니라 **러시아가 미국의 능력과 의지를 어떻게 평가하기 시작했는가**다.
실제 전력의 약화보다 위험한 순간은 상대가 약화됐다고 믿고 행동하기 시작할 때다.
푸틴이 시험하려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미국의 남은 힘’이다
현재까지 러시아가 나토 공격을 결정했다는 공개적인 증거는 없다.
미국 정보당국의 판단 역시 푸틴이 이란전쟁을 미국의 약화를 이용할 기회로 보고 있다는 것이지 러시아의 나토 침공이 임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CIA 국장이 직접 모스크바까지 날아갔다는 사실은 미국이 러시아의 인식 변화 자체를 위험신호로 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란전쟁이 길어질수록 미국은 방공 요격탄과 정밀무기를 더 많이 소비한다. 같은 시기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압력을 높이면 워싱턴은 중동과 유럽 가운데 어디에 제한된 전력을 우선 배치할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을 맞을 수 있다.
러시아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런 선택의 비용이다. 앞으로 더 현실적인 위험은 러시아가 어느 날 갑자기 나토와 전면전을 시작하는 시나리오가 아닐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세를 조금씩 확대하고 유럽에서는 도발의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이면서 미국이 어디까지 개입하는지를 시험하는 과정이 오히려 더 위험하다.
랫클리프가 모스크바로 날아간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고의 대상은 러시아였지만 그 경고를 필요하게 만든 것은 미국 자신의 전략적 부담이었다.
이란전쟁에서 사용되는 미사일 한 발은 중동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같은 무기를 기다리는 우크라이나의 방공망과 유럽의 억지력, 인도·태평양의 대비태세까지 연결돼 있다.
그래서 이번 사태의 본질은 러시아가 갑자기 강해졌다는 데 있지 않다. 러시아가 미국이 예전만큼 모든 곳에서 동시에 강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그리고 국제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실제 힘의 균형이 바뀌었을 때만 오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고 믿고 그것을 시험하기 시작할 때도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