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6-09-17 22:05 (목) 09.17 (목)
‘5년 치 전기료 미리 내라’ 한전 제안에 삼성·SK 거절…25조 원…

‘5년 치 전기료 미리 내라’ 한전 제안에 삼성·SK 거절…25조 원의 셈법

3줄 요약
  • 한전의 5년 치 선납 제안에 양사 “수용 어렵다”…210조 원 부채와 10GW 넘는 전력 수요 사이에서 드러난 투자재원 문제
  • 삼성전자 약 20조 원·SK하이닉스 약 5조 원…호황에도 미래 업황과 현금 운용 불확실성 택했다
  • 기업에는 장기 비용 부담, 한전에는 전력망 투자재원…용인·호남 클러스터 확대로 새로운 비용분담 모델 요구

25조 원 전기료 선납 거절이 드러낸 K반도체의 전력 딜레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전력이 제안한 약 25조 원 규모의 ‘5년 치 전기요금 선납’ 방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인공지능(AI) 확산에 힘입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현재의 호황이 앞으로 5년 동안 이어진다고 전제해 수십조 원의 비용을 먼저 집행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표면적으로는 기업과 전력공기업 사이의 ‘납부 시점’을 둘러싼 문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훨씬 복잡한 문제가 있다. AI 시대를 맞아 반도체 생산시설의 전력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송·변전망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문제는 그 비용을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부담하느냐다. 이번 25조 원 선납 제안과 거절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앞으로 풀어야 할 ‘전력 인프라의 경제학’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삼성 20조·SK 5조…한전은 왜 ‘선납 카드’를 꺼냈나

한전은 2026년 7월 9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전력망 건설 재원 확보를 위한 전기요금 선납 제안’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제안 규모는 삼성전자 약 20조 원, SK하이닉스 약 5조 원으로, 2025년 양사가 납부한 전기요금을 기준으로 약 5년 치에 해당한다. 양사는 내부 검토를 거쳐 참여가 어렵다는 뜻을 한전에 전달했다.

한전의 제안은 단순히 전기요금을 일찍 받겠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확보한 선수금을 국가 기간 전력망과 첨단산업 전력 인프라에 투입하고, 기업에는 국고채 2년물 금리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를 적용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이자는 현금 지급 대신 향후 반기별 전기요금에서 차감하는 방식이 거론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장래 낼 비용을 먼저 지급하는 대신 일정한 금융상 이익을 얻고 필요한 전력망을 조기에 확보할 가능성이 생긴다. 한전 입장에서는 채권 발행을 늘리지 않고 대규모 투자재원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런 구상이 등장한 배경에는 한전의 재무 부담이 있다. 2026년 6월 말 기준 한전의 총부채는 약 210조 7,000억 원에 달하고 하루 이자 부담도 약 115억 원으로 알려졌다. 한전채 발행 한도를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최대 5배까지 한시적으로 확대한 특례 역시 2027년 말 종료를 앞두고 있다.

25조 원은 이런 상황에서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단순 계산하면 한전 총부채의 약 11.9%에 해당한다.

2-1 25조 원 전기료 선납 거절과 전력투자 딜레마.png

호황인데 왜 거절했나…핵심은 ‘5년의 불확실성’

두 회사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배경을 단순히 자금 부족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핵심은 돈의 규모와 시간이다.

반도체 산업은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AI용 고대역폭메모리(HBM)를 중심으로 수요가 강하더라도 메모리 가격, 공급 증설, 글로벌 경기, 기술 전환, 미·중 갈등 등 여러 변수가 수년 사이 기업 실적을 크게 바꿀 수 있다.

따라서 2026년의 좋은 실적을 기준으로 향후 5년의 전력비를 한꺼번에 고정해 선집행하는 것은 기업 재무전략 측면에서 다른 문제다. 25조 원을 먼저 지급하면 그만큼 연구개발(R&D), 첨단 생산시설, 인수합병(M&A) 등에 활용할 수 있는 현금 운용의 선택지가 줄어든다.

실제로 복수 보도는 양사가 현재 반도체 호황에도 불구하고 향후 5년 동안 같은 수준의 실적이 유지된다고 전제하기 어렵다는 점과 대규모 비용의 선집행 부담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는 ‘전기료를 낼 수 있느냐’보다 ‘왜 5년 치 비용을 지금 내야 하느냐’의 문제에 가깝다.

2-2 반도체 전기료와 전력 인프라 갈등.png

반도체 공장에 전기는 ‘원재료’에 가깝다

전력 문제의 무게는 반도체 산업의 특성을 보면 더 선명해진다.

반도체 제조공장은 수천 개의 장비와 공조·냉각·정화 시스템을 24시간 가동한다. 삼성전자 역시 반도체 산업을 에너지 집약적 산업으로 설명하면서 제조설비의 전력 사용 효율을 높이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공개한 지속가능경영 데이터에 따르면 회사 전체 사업장의 전력 사용량은 2023년 29,956GWh에서 2024년 32,083GWh, 2025년 33,509GWh로 증가했다. 이 가운데 한국 사업장의 2025년 전력 사용량은 26,618GWh였다. 회사 전체 기준이어서 반도체 사업만의 사용량으로 볼 수는 없지만, 첨단 제조업에서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앞으로 문제는 더 커진다.

정부는 용인 반도체 산단에서 10GW가 넘는 대규모 전력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26년 정부 계획에서는 지역 내 발전력과 중부·영동권 발전력을 활용하고 송전망을 단계적으로 확충해 최종 전력 공급 시점을 당초 2053년에서 2042년까지 앞당기겠다는 방안도 제시됐다.

2026년 8월 정부 발표에서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최종 전력수요를 14.7GW로 제시하고 2041년까지 공급하겠다는 계획도 공개됐다. 사업 범위와 계획의 구체화 과정에서 수치와 일정이 조정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실제 전력망 건설계획을 계속 확인해야 할 대목이다.

정부와 한전, 지방자치단체, 기업들이 2026년 8월 12일 호남권·용인 반도체 산업단지의 전력 공급을 위한 협약까지 체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2-3 반도체 전기료 25조 원 선납 논란.png

문제는 ‘누가 전력망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전력망은 반도체 기업만 사용하는 시설이 아니다. 국가 기간 인프라인 동시에 특정 대규모 산업단지가 막대한 신규 투자를 촉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선택지는 간단하지 않다.

비용을 일반 전기요금에 폭넓게 반영하면 가계와 다른 산업이 첨단산업 인프라 비용을 함께 부담한다는 논란이 생길 수 있다. 반대로 대규모 수요기업에 대부분 부담시키면 한국의 산업용 전력 비용이 상승해 미국·대만·일본 등과 경쟁하는 국내 반도체 생산기지의 투자 매력이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한전이 이번에 제시한 선납 방식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하나의 금융적 실험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기업들이 참여하지 않으면서 ‘전력망 조기 확보의 편익을 얻는 기업이 투자재원을 얼마나 선부담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다시 남았다.

특히 이번 선납 제안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집중됐다. 한전은 두 회사 외 다른 기업에는 선납을 제안하지 않았으며 향후 추가 제안 기업도 정해지지 않았다고 국회에 답변했다.

때문에 앞으로 비슷한 제도를 추진하려면 대상 기업 선정 기준과 이자율, 선납기간, 전력망 이용에 따른 편익, 위험분담 구조 등을 보다 명확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2-4 반도체 전기료와 미래 경쟁력.png

‘25조 원 거절’ 이후가 더 중요하다

기업이 선납을 거절했다고 해서 전력망 투자를 미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반도체와 AI를 국가 성장전략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대규모 생산시설과 AI 데이터센터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공장뿐 아니라 데이터센터까지 빠르게 늘어나면 발전설비만큼 중요한 것이 전기를 실제 수요처까지 운반하는 송·변전망이다.

따라서 해법 역시 ‘선납이냐 아니냐’의 이분법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정부와 한전은 전력망 투자비 가운데 국가 기간망과 특정 산업단지 전용 인프라의 비용을 구분하고, 정부 재정·한전 투자·수요기업 분담을 조합하는 구조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기업이 직접 또는 공동으로 인프라 투자에 참여하고 장기간 사용료나 전기요금에서 회수하는 방식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다만 구체적인 부담률과 수익률은 별도의 사회적·정책적 합의가 필요한 영역이다.

기업에도 과제가 있다. 필요한 전력망을 국가가 무조건 먼저 건설해 주기를 기대하기보다는 장기 전력수요 전망을 보다 투명하게 제시하고, 생산시설 투자 일정과 전력망 건설 시기를 연계하는 협력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번 25조 원 선납 제안은 무산됐지만 논쟁 자체는 이제 시작에 가깝다.

AI 시대의 반도체 경쟁력은 미세공정과 HBM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공장에 필요한 막대한 전력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필요한 시점까지 공급할 수 있는지도 생산기지 경쟁력의 일부다.

2-5 지속 가능한 전력, K-반도체의 미래.png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거절한 것은 ‘전력의 필요성’이 아니라 5년 치 비용을 지금 부담하는 방식이었다. 결국 25조 원의 빈자리를 어떤 재원과 위험분담 구조로 채울지가 K반도체 전력정책의 다음 시험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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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숙 기자
eunsoug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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