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 2026-09-02 22:01 (수) 09.02 (수)
반도체가 만든 821조 예산…정부가 162조원을 따로 쌓는 이유

반도체가 만든 821조 예산…정부가 162조원을 따로 쌓는 이유

역대 최대 나라살림 국회 심사대에…성장투자와 재정통제 사이 해법은

821조 '슈퍼예산' 국회로…162조 미래대응기금, 성장 마중물인가 통제 밖 곳간인가

반도체 호황에 국세수입 49.8%↑…AI·반도체 21조, 청년 43조 투입

104조는 '재정 저수지'로 적립…"경기 방파제" vs "상시 추경" 정면충돌

55년 된 교육교부금 연동 구조 개편도 뇌관…정기국회 최대 승부처

정부가 2027년도 예산안을 사상 처음 800조원을 넘어선 820조9000억원 규모로 편성했다. 반도체 슈퍼사이클로 불어난 세수를 재원 삼아 162조3000억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을 신설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는 예산안과 함께 미래대응기금법 제정안, 국가재정법·지방교부세법·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그러나 국회 의결 없이 정부가 기금의 주요 항목 지출을 최대 30%까지 바꿀 수 있도록 한 조항을 두고 논란이 이미 불붙었다. 이번 정기국회의 쟁점은 '얼마를 쓰느냐'가 아니라 '누가 통제하며 쓰느냐'로 옮겨가고 있다.

■ 반도체가 바꾼 나라 살림

2027년 총수입은 880조8000억원으로 올해 본예산보다 205조6000억원(30.4%) 늘어날 전망이다. 국세수입만 584조4000억원으로 194조2000억원(49.8%) 급증한다. 총지출은 820조9000억원으로 올해 727조9000억원보다 93조원(12.8%) 증가한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증가율을 웃도는 수준이다.

역설적이게도 '역대 최대 지출'과 '재정수지 개선'이 동시에 나타난다.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는 올해 -3.9%에서 -0.1%로 좁혀지고, 국가채무비율도 내년 48.3%에서 2030년 49.0%로 안정적 수준을 유지한다는 것이 정부 전망이다.

전제가 있다. 세수가 전망대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기금의 기본 재원인 '추가세수'는 내년 예상 국세수입의 27.8%에 이른다. 반도체는 대표적 경기순환 산업이다. 메모리 가격, AI 투자 사이클, 미·중 기술경쟁에 민감한 세수를 구조적 세입으로 간주해 고정지출을 늘리면, 업황이 꺾이는 순간 부담은 고스란히 다음 정부와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1 ① 「반도체 호황이 바꿔놓은 대한민국 821조 국가예산의 새로운 재정 지형」.png
반도체 호황이 바꿔놓은 대한민국 821조 국가예산의 새로운 재정 지형

■ 162조를 쪼개보면

기금은 총괄계정 109조4000억원과 사업계정으로 나뉜다. 사업계정은 청년 13조3000억원, 성장동력 14조2000억원, 지방 15조3000억원, 교육·인재 10조1000억원으로 배분되며, 이 가운데 45조4000억원을 내년에 실제 집행한다. 12조5000억원은 국채 신규 발행 축소에 쓰고, 남는 104조4000억원은 여유자금으로 주식·채권 등에 운용한다.

투자 방향은 선명하다. 반도체 경쟁력과 피지컬 AI, 전력·용수·산업단지 인프라에 21조3000억원(97.2% 증)이 투입된다. 첨단전략산업·에너지 전환 등 미래 성장엔진에 62조8000억원(22.7% 증), 청년 지원에 43조3000억원(53.5% 증)이 배정됐다.

1 ② 「162조 미래대응기금이 AI·반도체·청년·지역으로 흘러가는 국가투자 구조」.png
162조 미래대응기금이 AI·반도체·청년·지역으로 흘러가는 국가투자 구조

■ "재정 안전판" vs "상시 추경"…이미 붙은 불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은 이번 예산안을 "역사적 전환점이 되는 재정계획"이라고 규정했다. 청와대도 기금운용계획이 국회 심사를 거치고 변경 시 국회에 보고하도록 했다며 "정부 쌈짓돈이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논란의 핵심은 조문 하나다.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미래대응기금을 일반 기금에 적용되는 20% 변경한도에서 빼내 금융성 기금과 같은 30% 한도를 적용하도록 했다. 국회가 심의한 주요항목 지출금액을 30% 이내에서 바꿀 때는 기금운용계획변경안을 국회에 내지 않아도 된다.

학계 반응은 냉정하다. 허정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회 심의를 거치지 않는 부분이 3분의 1에 달한다며 "사실상 상시 추경"이라고 지적했다. 김우철 서울시립대 교수는 이미 집행한 뒤 받는 사후 승인은 요식행위에 그친다고 우려했다. 임이자 국민의힘 의원도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국회 통제를 피해 꺼내 쓰는 쌈짓돈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여러 부처 사업이 한 기금에 묶여 있어 일부 항목 변경만으로 수조원대 재정이 국회 추가 심사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하나의 뇌관은 교육재정이다. 정부는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의 내국세 연동 구조를 55년 만에 손질하고, 100조원이 넘는 지출 구조조정을 병행하기로 했다. 학생 수 감소를 근거로 한 조정 요구와, 돌봄·디지털 전환 수요를 학생 수만으로 재단할 수 없다는 교육계 반론이 정면으로 부딪힌다.

1 ③ 「821조 슈퍼예산을 심사하는 국회와 거대 미래기금을 둘러싼 견제와 균형」.png
821조 슈퍼예산을 심사하는 국회와 거대 미래기금을 둘러싼 견제와 균형

■ 해법은 '돈'보다 '룰'을 먼저 정하는 것

첫째, 투자 기준의 법정화다. 무엇이 '미래 투자'인지 대상과 요건을 법률과 공개 지침으로 못 박아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특정 사업을 임의로 미래 투자로 분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기금 신뢰의 출발점이다.

둘째, 30% 특례의 재설계다. 신속 집행의 필요는 인정하되, 일정 금액을 넘는 변경은 국회 동의를 받게 하고 분기별 공개 보고와 결산 연계를 의무화해야 한다. 사후 승인이 요식행위가 되지 않으려면 결산 단계의 제재 수단이 함께 설계돼야 한다.

셋째, 세수 스트레스 테스트다. 세수가 전망보다 5%, 10%, 20% 부족할 경우 어떤 사업부터 조정할지 우선순위를 미리 공표해야 한다. 그래야 호황기의 일시적 세금이 불황기의 항구적 의무지출로 굳어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1 ④ 「반도체 호황 이후까지 대비해야 하는 대한민국 재정의 선택과 미래 성장 전략」.png
반도체 호황 이후까지 대비해야 하는 대한민국 재정의 선택과 미래 성장 전략

■ 국민이 물어야 할 질문

821조원은 기록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돈이 일자리와 성장률, 지역격차, 청년의 기회를 실제로 바꾸느냐다. 반도체 호황이 만들어낸 뜻밖의 재정 여력이 대한민국의 장기 경쟁력으로 전환될지, 아니면 호황기에 몸집만 키운 재정으로 남을지. 첫 시험대는 이제 국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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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록 기자
parkroc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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