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코 공주는 왜 왕위에 오를 수 없나…일본이 택한 ‘600년 전 남성 혈통’

일본 국회는 17일 옛 황족 가문의 남계 남성을 현재 황실의 양자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황실전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양자로 들어온 남성에게서 태어난 아들에게 황위 계승 자격을 부여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여성 황족이 일반인과 결혼한 뒤에도 황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지만, 여성 본인과 그 자녀에게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결국 일본 정치권은 현 일왕의 직계 자녀인 아이코 공주보다 수백 년 전에 갈라진 방계 황족의 남성 혈통을 황실의 미래로 선택했다.
황족은 줄어드는데 여성 천황은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일본 정치권이 황실전범 개정에 나선 직접적인 이유는 황족 수의 급격한 감소다. 현행 제도에서는 여성 황족이 일반인과 결혼하면 황족 신분을 잃는다.
남성 황족 출생은 드문데 여성 황족마저 결혼과 함께 황실을 떠나면서 공식 행사와 외교, 의전 업무를 담당할 인력이 부족해졌다.
현재 황위 계승 자격자는 나루히토 일왕의 동생인 후미히토 왕세제, 그의 아들 히사히토 친왕, 일왕의 숙부인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뿐이다.
장기적으로는 황실의 존속이 사실상 히사히토 친왕 한 사람에게 달린 구조다. 일본 정부와 보수 정치권이 제시한 해법은 여성 황족의 결혼 후 신분 유지와 옛 황족 남성의 양자 편입이었다.
그러나 여성 황족은 황실의 공무와 의전은 계속 맡을 수 있어도 천황은 될 수 없다. 책임은 유지하면서 최고 지위에 오를 자격은 주지 않는 구조다.
더 큰 논란은 양자 대상자들이다. 이들은 1947년 황적에서 이탈한 옛 11개 방계 황족 가문의 남계 후손들로 나루히토 일왕과 공통 조상이 약 600년 전까지 거슬러 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 일왕의 친딸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하면서 사실상 일반인으로 살아온 먼 친척 남성을 황실로 다시 불러들이는 셈이다.
이 때문에 이번 개정은 황위 계승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현실적 방안이라기보다 여성 천황을 피하기 위해 남성 혈통을 끌어온 제도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 대상 남성들이 황실 양자가 되기를 원할지도 불분명하다. 황족이 되면 직업과 결혼, 재산 관리, 정치적 표현 등 일상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는 만들었지만, 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황위 계승 안정이라는 목적도 달성하기 어렵다.
국민은 여성 천황을 지지하지만, 정치권은 ‘남계’만 지켰다
일본의 황위 계승 논쟁에서는 여성 천황과 여계 천황을 구분해야 한다. 여성 천황은 황실의 남계 혈통을 가진 여성이 천황이 되는 경우다. 아이코 공주가 즉위하면 여성 천황이 된다.
여계 천황은 어머니를 통해 황실 혈통을 이어받은 자녀가 황위를 계승하는 경우다. 아이코 공주가 일반인 남성과 결혼해 낳은 자녀가 왕위에 오르면 여계 천황으로 분류된다.
일본 역사에는 여성 천황이 존재했다. 따라서 여성이 천황이 된 전례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보수 진영은 과거 여성 천황도 부계로 황실 혈통을 이어받았고 여성 천황을 허용하면 결국 여계 천황으로 이어져 남계 황통이 끊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두 문제는 법적으로 분리해 논의할 수 있다. 아이코 공주 개인에게 계승권을 부여하되 그 자녀의 계승 문제는 별도로 정할 수도 있고 성별과 관계없이 일왕의 첫째 자녀가 계승하도록 제도를 바꿀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치권은 여성 천황과 여계 천황을 하나의 문제처럼 묶어 아이코 공주의 계승 가능성 자체를 논의하지 않았다. 국민 여론과도 거리가 있다.
일본 주요 언론의 여론조사에서는 여성 천황을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이 대체로 70%를 넘었다. 일부 조사에서는 찬성 비율이 80% 안팎까지 나타났다.
일본 헌법은 천황의 지위가 “주권을 가진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고 규정한다. 국민 다수가 여성 천황에 찬성하는 상황에서 정치권이 이를 외면하고 먼 남계 후손을 선택한 것이 과연 국민의 총의에 부합하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 주요 언론도 비판에 나섰다. 요미우리신문은 전후 80년에 걸쳐 형성된 국민과 상징천황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제도 변경이라고 지적했다.
아사히신문은 여성 천황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높은데도 정치권이 이를 논의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반면 산케이신문은 남계 황통을 지키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라며 개정안을 옹호했다.

국제사회에서는 일본의 남성 전용 황위 계승 제도가 성평등 원칙과 충돌한다는 지적이 이어져 왔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24년 황위를 남계 남성에게만 허용한 황실전범을 개정해 남녀가 동등하게 계승할 수 있도록 하라고 권고했다.
일본 정부는 왕위 계승 자격은 일반 국민의 기본권이나 공직 취임권과 같은 성격이 아니며 황위 계승 방식은 역사와 전통에 관한 문제이므로 여성 차별로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천황이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최고 상징적 지위에 여성이 오를 수 없다고 법률로 규정하는 것은 성별에 따른 역할 차이를 국가가 공식적으로 유지하는 효과를 낳는다는 반론도 크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모든 나라의 모든 지위에서 여성의 권리 향상으로 이어지는 포용적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유럽의 여러 입헌군주국은 이미 성별과 관계없이 첫째 자녀가 왕위를 잇는 방식으로 제도를 바꿨다. 스웨덴과 네덜란드, 노르웨이, 벨기에, 덴마크 등이 대표적이다.
왕실의 전통을 모두 버린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의 성평등 인식과 함께 변화해야 군주제가 지속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은 반대 방향을 택했다. 국민 다수가 여성 천황에 찬성하고 현 일왕에게 직계 딸이 있는데도 성별과 무관한 장자 승계보다 먼 남계 후손의 황실 편입을 선택했다.
계승 위기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뒤로 미뤘다
일본 정부는 이번 개정으로 황족 수 감소와 황위 계승 불안을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 황족이 결혼 후에도 황실에 남으면 공무 인력은 유지될 수 있다.
옛 황족 남성을 양자로 받아들이면 장기적으로 남성 황족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두 방안 모두 불확실하다. 여성 황족이 결혼 뒤에도 황실에 남기를 원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배우자와 자녀는 일반인인데 본인만 황족으로 남는 가족관계가 실제 생활에서 어떤 부담을 낳을지도 알 수 없다. 양자 대상 남성들이 황실 편입을 원할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설령 양자가 들어오더라도 그에게 아들이 태어나야 황위 계승자가 확보된다. 결국 이번 개정은 현재 존재하는 여성 황족의 계승 가능성을 막은 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남성 후손에게 황실의 미래를 맡긴 셈이다.
히사히토 친왕이나 새로 편입된 남성 황족에게 아들이 없으면 같은 위기는 다시 돌아온다. 일본 정치권은 황위 계승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했다기보다 여성 천황 논의를 피하며 시간을 번 것에 가깝다.
일본 황실은 전후 헌법 아래에서 통치자가 아니라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존재해 왔다. 상징은 법률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국민이 황실을 자신들의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존재로 받아들일 때 지속될 수 있다.
이번 개정은 남계 황통이라는 전통은 지켰지만, 국민 다수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아이코 공주의 계승 가능성은 배제했다.
아이코 공주가 황위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는 능력도 국민의 반대도 아니다. 오직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일본이 그 모순을 계속 외면한다면 황위 계승 위기보다 더 큰 문제는 국민과 황실 사이의 거리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