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는 무엇이 문제인가…한국만의 주거 시스템은 왜 한계에 이르렀나

수십 년 동안 전세는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계약으로 자리 잡았고 특히 청년과 신혼부부에게는 내 집 마련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최근 전세를 둘러싼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전세사기와 보증금 미반환 문제가 사회적 충격을 안긴 데 이어 전국적으로 전세 비중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여기에 이재명 대통령이 전세를 "일종의 사금융"이라고 표현하면서 전세의 존속 여부를 둘러싼 논쟁도 다시 불붙었다. 하지만 전세의 미래를 논하기 전에 먼저 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전세는 왜 지금 줄어드는가가 아니라, 왜 한국에서만 수십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전세를 둘러싼 논쟁은 찬반만 반복할 뿐 해법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전세는 세계적으로 드문 '한국형 금융 시스템'이었다
전세는 단순한 임대계약이 아니다. 세입자는 거액의 보증금을 맡기고 일정 기간 월세 없이 거주하고 집주인은 그 자금을 활용해 다른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사업자금 생활자금으로 활용한다.
계약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주는 구조다. 형식은 임대차 계약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장기간 무이자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 거래에 가깝다. 이러한 제도는 해외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과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월세 중심 시장이 형성돼 있으며, 보증금도 통상 1~3개월 치 월세 수준에 머문다. 일본 역시 일정한 보증금은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주택 가격의 절반 이상을 맡기는 전세 제도는 사실상 없다.
한국에서만 전세가 자리 잡은 이유는 당시의 경제 환경 때문이다. 1960~1980년대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주택 공급은 부족했지만 금융시장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
은행 대출은 제한적이었고 금리는 높았으며 주택가격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전세는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집주인은 은행 대신 세입자로부터 자금을 조달했고 세입자는 월세 부담 없이 거주하며 목돈을 축적할 수 있었다.
결국 전세는 단순한 임대 방식이 아니라 당시 한국 경제가 만들어낸 독특한 금융 시스템이었다.
전세를 지탱했던 경제 환경이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전세를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을 운용해 높은 이자 수익을 얻거나 추가 부동산을 매입하면서 자산을 늘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간 이어진 저금리 기조는 보증금 운용의 매력을 크게 낮췄다. 여기에 다주택 규제와 대출 규제, 세제 변화가 이어지면서 전세보증금을 활용한 투자 역시 이전보다 어려워졌다.
임대인 입장에서는 거액의 보증금을 보관하는 것보다 매달 안정적인 임대료를 받는 월세가 점점 더 합리적인 선택이 됐다. 세입자의 부담도 크게 달라졌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전세가격이 급등하면서 상당수 가구는 전세를 얻기 위해 수억 원의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과거 전세는 월세를 줄이는 제도였지만, 이제는 대출을 전제로 하는 계약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금융 비용이 커질수록 전세의 장점도 자연스럽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전세가 예상보다 오래 유지된 배경에는 정부의 전세대출 정책이 있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부는 서민 주거 안정을 위해 공적 보증을 기반으로 한 전세대출을 확대했고 금융기관도 적극적으로 자금을 공급했다.
덕분에 목돈이 부족한 세입자도 전세를 선택할 수 있었고 시장 역시 급격한 월세 전환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세대출은 또 다른 변화를 만들었다.
세입자가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이 늘어나면서 전셋값도 함께 상승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전세보증금을 활용한 갭투자가 빠르게 확산됐다.
전세는 더 이상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유지되는 제도가 아니라 금융과 공적 보증이 함께 떠받치는 구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는 전세대출이 잘못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에는 실수요자의 주거 안정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었다. 다만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금융 의존도가 계속 높아질수록 제도는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취약한 구조를 갖게 됐다.
전세사기가 무너뜨린 것은 돈이 아니라 '신뢰'였다
전세가 수십 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전제는 단 하나였다. 계약이 끝나면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였다. 하지만 최근 대규모 전세사기는 바로 이 전제를 무너뜨렸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잇따르면서 세입자는 전세 자체를 위험한 계약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임대인 역시 보증금 반환 부담을 고려해 월세를 선호하는 경우가 늘었다.
물론 모든 전세가 위험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계약은 정상적으로 종료되고 있으며 전세보증보험과 보증기관의 안전장치도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금융 시스템은 신뢰를 기반으로 작동한다. 한 번 신뢰가 흔들리면 제도 전체의 비용이 높아지고 시장 참여자들의 행동도 빠르게 바뀐다.
전세사기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개별 피해 규모가 아니라 전세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전세의 존폐 논쟁이 아니라 새로운 주거 시스템이다
전세가 당장 사라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지역과 주택 유형에 따라 여전히 전세를 선호하는 수요가 존재하고 일정 기간은 전세와 월세가 함께 공존하는 시장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장기적인 방향은 점차 월세와 장기 임대 중심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문제는 전세를 없앨 것인가가 아니다.
전세가 수행해 온 기능을 무엇이 대신할 것인가이다. 청년과 신혼부부가 안정적으로 거주하면서 자산을 형성할 수 있는 환경은 어떻게 만들 것인가.
월세 부담이 커지는 시대에 실수요자를 위한 금융 지원은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민간 장기임대와 공공임대는 어떤 역할을 나눠야 하는가.
기업형 임대주택과 민간 임대시장은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전세 감소는 단순한 임대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주거 불안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
전세의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전세는 한국 경제 성장과 함께 탄생했고 금융시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주택 공급과 자산 형성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 독창적인 제도였다.
하지만 경제 환경과 금융 시스템, 인구 구조, 부동산 시장이 모두 달라진 지금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전세를 유지하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렇다고 전세를 실패한 제도로 단정할 필요도 없다. 전세는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국민의 주거 안정을 뒷받침하며 한국 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전세를 지키느냐 없애느냐를 둘러싼 이념적 논쟁이 아니다. 변화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주거 금융 시스템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주거는 단순히 집을 빌리는 문제가 아니라 삶의 기반이며 경제의 토대다. 전세를 둘러싼 진짜 질문 역시 '전세를 없앨 것인가'가 아니라 국민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다음 주거 시스템은 무엇인가여야 한다.
그 답을 찾는 것이 전세 논쟁이 궁극적으로 향해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