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서 다시 꺼낸 ‘한반도 평화체제’, 현실의 벽 넘을까
- 이재명 대통령 ‘중단→축소→핵 없는 한반도’ 제안…북한은 핵보유 불가역 고수
- DMZ 지뢰 사고·북한 핵전략·한미 공조가 가를 단계적 해법의 성패
- 유엔에서 제시된 평화공존 구상, 선언을 넘어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이재명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제81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당사자 간 대화를 공식 제안했다. 그러나 연설 전날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에서 지뢰 추정 폭발 사고가 났고, 북한 대표단은 연설장을 비웠다. 구상의 무게만큼 넘어야 할 현실의 벽도 높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자 대화 틀'과 단계적 해법
이 대통령은 오랫동안 멈춰 있던 북·미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고 이것이 전쟁 종식과 평화체제 전환을 위한 당사자 간 대화로 발전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남북과 함께 미국·중국을 평화체제 논의의 '관련국'으로 직접 거론한 점이 눈에 띈다. 최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결단으로 변화의 가능성이 어렵게 만들어졌다는 평가도 곁들였다.
평화공존의 방향으로는 서로를 존중하는 포용적 평화공존, 싸울 필요가 없는 안정적 평화공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책임 있는 평화공존을 제시했다. 북핵 문제에 대해서는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먼저 멈추게 하고, 중기적으로 이를 줄인 뒤, 장기적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지향하는 단계적 해법을 내놨다. 호르무즈 사태에 따른 에너지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건설적 기여국 연대'도 함께 제안했다.
DMZ 폭발과 북한의 '핵 불가역' 선언
연설 하루 전인 21일 오전 10시50분쯤, 25사단 관할 서부전선 DMZ 군사분계선(MDL) 이남에서 수색로 개척 작전을 하던 간부 3명이 지뢰 추정 폭발로 다쳤다. 대대장(중령)은 발목이 절단되는 중상을 입었다. 합참은 유엔사 현장조사를 앞두고 장병 18명이 안전 통로 확보에 나섰으며, 폭발은 두 차례 있었다고 밝혔다. 북한 매설 지뢰인지는 아직 조사 중이며, 국과수 감정 1차 결과는 다음 주 나올 예정이다. MDL 이남 DMZ에서 지뢰로 중상자가 나온 것은 2015년 8월 목함지뢰 사건 이후 11년 만이다.
북한은 이에 앞서 강경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은 17일 담화에서 IAEA 총회의 비핵화 촉구를 "귀에 익은 잡소리"라고 일축하며 핵보유국 지위는 되돌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통일부는 이번에는 발표 주체의 격을 김여정 부장으로 높여 핵보유 지위의 불가역성을 다시 강조한 것으로 봤다.

같은 연설, 정반대 평가
여당은 호평했다. 민주당은 이 대통령이 평화공존의 청사진을 세계 앞에 내놓았다고 평가했고, 박지원 의원은 단계적 비핵화 구상을 가장 현실적인 대북 평화 제안이라고 했다.
야당은 강하게 반발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이 대통령이 뉴욕타임스 서면 인터뷰에서 대북 제재와 추가 핵·ICBM 개발 중단을 맞바꾸는 거래에 상당한 가치가 있다고 한 발언을 문제 삼았다. 박충권 수석대변인은 방미 기간 DMZ 사고 등을 거론하며 안보에 구멍이 뚫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경원 의원은 '핵 없는 한반도' 구상이 완전한 비핵화를 후순위로 미룬 것으로, 사실상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는 셈이라고 비판했다.
국제사회 반응은 엇갈렸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연설 뒤 면담에서 한국 정부의 한반도 평화 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유엔도 가능한 역할을 찾겠다고 했다. 같은 날 30분간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은 핵잠수함, 농축·재처리, 조선 협력, 전작권 전환 분야의 협력을 심화하고 후속 협의를 이어가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과 대화할 의지를 재확인했다.
반면 북한 대표단은 트럼프 대통령 연설 때는 외교관 2명이 자리를 지켰으나, 이 대통령 연설 때는 자리를 비웠다. 지난해 연설 때도 불참했으며, 배정된 좌석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문제점과 쟁점
첫째, 단계론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이다. 정부·여당은 이를 현실적인 출구로 보고, 야당은 핵보유를 묵인하는 것이라 우려한다. 여기에는 '중단'의 범위와 검증 방식이 불분명하다는 공통된 공백이 있다.
둘째, 북한의 호응이 없다. 미국 전문가들의 시각도 신중하다. 코리아소사이어티의 조너선 코라도 정책국장은 북한이 러시아·중국과의 관계 강화로 협상력이 커져 당장 대화에 나설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빅터 차 CSIS 한국석좌도 트럼프의 재관여 의지와 김정은의 계산이 반드시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짚었다.
셋째, 안보 사고와 평화 메시지가 한꺼번에 겹쳤다. DMZ 사고의 원인이 규명되기 전에 정치 공방이 먼저 불붙으면서, 사실관계보다 진영 논리가 앞서고 있다.
해결 방안
1. DMZ 사고의 원인을 투명하게 규명하는 것이 먼저다. 북측의 소행으로 확인되면 유엔사를 통해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평화 구상의 신뢰도 선다.
2. 단계론의 로드맵을 구체화해야 한다. '중단' 단계에 단거리 미사일이 포함되는지, 검증 장치는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야당이 제기한 우려에 답하는 길이기도 하다.
3. 워싱턴 후속 협의에서 대북 접근의 공동 원칙을 문서로 정리해 한미 간 엇박자 논란을 없애야 한다.
4. 28일로 예정된 김선경 북한 외무성 부상의 연설을 면밀히 분석하고, 유엔 등 제3자 채널을 활용해 접촉 여지를 탐색해야 한다.
5. 국회에 여야가 함께 참여하는 외교안보 협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어질 수 있는 대북 정책의 최소 합의가 필요하다.
평화체제는 선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연설이 던진 비전이 공허한 수사로 남을지, 실질적 전환점이 될지는 앞으로의 검증 가능한 실행과 초당적 합의에 달려 있다.